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문단 편집) == [[일본 해군]]의 수장 == 1931년 말 육군참모총장(陸軍参謀総長)에 황족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閑院宮載仁親王)이 취임한데 대항하여, 1932년 2월에 이에 해군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히로야스를 해군 최고의 군령권자인 해군군령부장(海軍軍令部長)에 취임시켰다. 원수 칭호를 수훈받은 히로야스는 해군군령부장을 육군참모총장에 대응하여 군령부총장(軍令部総長)[* 육군과 달리 해군군령부총장이 아니라 그냥 군령부총장이다.]으로 바꿨다. 또한 히로야스를 찬양하는 노래[* 伏見軍令部總長宮を讃え奉る]까지 만들어졌다. 그가 군령부총장으로 있던 시절은 군령부(軍令部)가 권한강화를 위해 움직이던 때로 히로야스 자신도 육군과 달리 전통적으로 해군성이 우위를 점한데 대해 군령부의 권한강화를 위해 군령부령(軍令部令) 및 성부호섭규정개정안(省部互渉規定改正案)에 대해 “내가 재임하고 있을 때가 아니면 안 된다. 꼭 해내라.”고 다카하시 산키치(高橋三吉), 시마다 시게타로(嶋田繁太郎) 군령부차장에게 지시하여 함대파견 정책을 추진, 결국 해군군령부(海軍軍令部)의 호칭을 군령부(軍令部)로 해군군령부장의 호칭을 군령부총장으로 변경하였고 나아가 병력량의 결정권을 해군성에서 군령부로 이관하여 군령부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해군성의 기능을 제도상, 인사상 약체화하는데 성공하여 군령부는 해군성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리하여 [[추축국]] 삼국 동맹 및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해군 최고실력자로서 커다란 발언권을 가졌다. 태평양 전쟁 중에도 각 장관, 총장급 인사에도 히로야스의 양해를 얻는게 불문율이었다. [[2.26 사건]] 때는 사건발생일 아침 가토 간지(加藤寛治), 마사키 진자부로(真崎甚三郎)와 협의한 뒤 덴노를 예방했다. 이때 [[쇼와 덴노]]의 심기를 건드려서 이후 반란진압 쪽으로 선회한다.[* 참고로 2019년 확인된 해군 기밀자료에 의하면 쇼와 덴노가 그를 보자마자 제일 먼저 한 말이 해군 장교들이 해당 사건에 가담하지 않겠냐는 우려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그는 [[그런 거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1944년 6월 25일 [[사이판]] 섬의 포기를 결정한 어전회의에서 '육해군 모두 뭔가 특수한 병기를 고안해내어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대책은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전황이 이처럼 곤란하게 된 이상 항공기, 군함, 소함정 모두 특수한 것을 고안하여 신속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라고 발언했다. 이들 특수한 병기들은 특공병기를 가리키는 것이란 주장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